나무의 기록/언젠가 나무가 될 너에게

비 온 뒤 짙어지는 초록의 "싱그러움"

나무 슮 2023. 6. 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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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그렇듯, 나무가 그렇듯, 
비를 흠뻑 맞고난 후 나의 삶에도 성장의 시간이 오기를. 
그리고 한껏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존재가 되기를.


 

 

비가 자주 내리는 철이다. 너무 심하게 내리지도 않고 분무기를 뿌리듯 토독토독 내리는 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며 뜨거운 태양과 적당한 바람, 살랑이는 봄비는 나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초록의 것들은 비가 내리면 색이 진해진다. 향도 짙어진다. 

꼭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한껏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 그때의 나무들은  마치 이 때를 위해 태어난 단어처럼 "싱그럽다"는 단어가 참 잘어울린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늘 모든 여자친구가 그렇듯 나도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질문했었다.

"나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

그리고 남편은 멋지게 이 질문을 통과했었다.

"싱그러웠어."

 

남편은 나의 이미지를 '싱그럽다'고 표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밝고, 생기있고, 그러면서도 성숙한 생각을 하는 나의 모습이 싱그럽다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병원에서 일하는 남편은 주로 아픈 사람들만 보다가 나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실 비온 뒤 짙어지는 초록이 싱그럽다는 걸 알려준 건 남편이었다.

 

남편의 말처럼 우리의 첫 만남은 꽤 싱그러웠다. 주로 초록이들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어쩌다보니 남편은 나무를 사진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나무를 그림그리는 사람이었다. 식물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오래된 나무가 주는 생명력에 매력을 느끼며 작품으로까지 표현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봤기에 둘다 신기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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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만나기 이전, 선인장같은 연애를 했었다. 서로를 찌르고 찌르며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들고 있던, 그런 아프고 오랜 연애로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나는 연애에 회의적이었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싱그럽다고 말해주는 당시 남자친구인 남편이 참 신선했다. 내가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이긴 하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나무처럼 봐주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자존감이 낮아질 때마다 남편이 나에게 해준 '싱그러움'을 떠올렸다. 식물들이 그러하듯 이 비가 지나고 나면 더 짙어질 나의 싱그러움, 나의 본래 색을 드러낼 순간이 올거라고 그렇게 여기며 그 순간을 지난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축축하고, 습하고, 밖에 나가서 뭘 할수 없는 상태가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식물을 키우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소중함을 알게된 뒤로, 비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를 한껏 맡고난 식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그리고 존재감을 강하게 뿜어내며 내가 여기 있음을 드러낸다. 비에는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이 들어 있어서 조금 아팠던 식물조차 비를 맞으면 금방 기운을 차렸다. 

 

비가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을 그냥 습하고 힘들었던 날로 대할지, 나에게 성장을 주는 영양분으로 대할지는 마음가짐에 달려있음을 깨닫는다. 

 

식물이 그렇듯, 나무가 그렇듯, 

비를 흠뻑 맞고난 후 나의 삶에도 성장의 시간이 오기를. 

그리고 한껏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존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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